
조 철 민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사단법인 시민 정책위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해야 할 때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실로 오래됐지만, 현재의 의미에서 그 관계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즈음이다.1) 동구권이 해체되고 자유주의의 승리로 ‘역사의 종착점’에 다다른 줄 알았지만,2) 인류는 새로운 문제들을 마주했고 이를 해결할 주체로 국가도 시장도 아닌 시민사회가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40여년이 흐른 지금 논의의 중심은 ‘시민사회의 역할’에서 ‘국가-시민사회간 관계’의 문제로 변화하고 있다. 여러 가지 논의들이 있지만 간명하게 다음의 3가지 명제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복잡·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에 있어 시민사회의 역할이 증가하고 있어 효과적인 협력을 위한 관계 재설정이 필요하다. 과거 국가가 사회문제 해결의 주된 역할을 수행하고 부족한 부분을 시민사회가 보완하는 수준에서 시민사회가 감당하는 역할이 점점 더 커지면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어떻게 역할을 나누고 유기적으로 협력하는지가 중요해졌다.
둘째, 늘어나는 역할에 비해 시민사회가 처한 조건은 어려운 상황이고, 정부의 정책적, 제도적 관행은 시민사회의 활성화보다는 규제 중심이다. 시민사회는 자발적 공익활동의 힘으로 작동하는데, 시민들의 일상적 참여도,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나 활동가들이 처한 여건은 늘 어려웠고, 특히 전 세계적 경기불황과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시민사회 관련 정책은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 시절의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공익활동 주체들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활동 여건을 경직시키는 경우가 많다.
셋째, 시민사회는 시민들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힘을 비축하는 저수지와 같다. 즉 사회문제가 나타났을 때 시민사회라는 저수지의 물을 퍼다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쓴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마르지 않는 저수지가 아니어서, 물을 퍼다 쓰는 정책과 함께 물을 채우는 정책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문제 해결에 있어 시민사회의 역할 수행이나 국가-시민사회 사이의 협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미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
국가와 시민사회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한 논의가 우리만의 별스러운 논의일까? 둘러보면 이런 이야기는 이미 부쩍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먼저 국제연합(UN)은 인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추진에 있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계약”(new social contract for a new era)이 필요하며, 이는 “다양한 형태의 사람-국가(People-State) 사이, 즉 민·관 관계를 통해 생성”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기존의 사회계약은 시민들이 권력을 국가에 위임하고 보호를 받는 것에서, 새로운 사회계약은 공동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과 국가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했다. 새로운 관계의 핵심은 시민들이 공론을 통해 정책과정에 뜻을 반영하는 ‘숙의’(Deliberation),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의 ‘협력’(Collaboration), 그리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생각과 실천의 ‘연결’(Connection)로 개념화된다.3)
영국에서는 2025년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시민사회 협약’(Civil Society Covenant)이 출범했다. 이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국가와 시민사회간 협력과 지원에 관한 공동의 약속을 선언한 ‘사회적 협약’으로, 법령은 아니지만 국가와 시민사회간 관계의 준거가 된다. 영국에서 국가-시민사회간 협약은 1998년 ‘정부와 자원봉사 및 지역사회 부문 간의 관계에 관한 협약’(Compact on Relations between Government and the Voluntary and Community Sector in England, 줄여서 The Compact로 불린다)이나 2018년 ‘시민사회전략: 모두를 위한 미래 만들기’(Civil Society Strategy: building a future that works for everyone)을 거쳐 시민사회 협약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이런 시도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국가-시민사회간 협력과 지원에 관한 다양한 협약, 선언, 헌장 등으로 확산됐다. 시민사회와 국가가 함께 논의하고 합의한 상호관계를 공식적인 협약문서로 남기고, 이를 기반으로 상호 노력을 촉구하는 사회적 대화와 협약의 의미를 지닌다. 아래 시민사회 협약문의 한 대목은 협약의 의미와 내용을 잘 드러낸다.4)
“정부와 타인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시민사회의 모든 사람 간의 지속적인 협약입니다”
(중략)
“우리는 …시민사회 조직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자신들이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옹호하고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영국 전역의 국가 및 지방 차원에서 협력하여 변화를 위한 계획을 실행하고, 모든 정부 부서와 모든 사명에 걸쳐 파트너십을 맺고 협업합니다”
(후략)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관점의 전환
패러다임(Paradigm)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거나 사물에 접근하는 공통된 사고의 틀, 인식 체계”를 의미한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 그리고 국가와 시민사회간 유기적인 협력과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의 전환 없이는 과거의 사례들에서 보듯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저 그럴 듯하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한 철 유행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전 세계적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파도를 탈 준비가 되지 않으면 그 파도에 떠내려가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한 뒤탈은 또 우리가 감당하게 될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시도되고 있는 국가와 시민사회간 협력관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협력관계의 토대를 튼튼하게 하려면 상호 불신에 뿌리를 두는 규제로부터,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고 기다려 주는 신뢰에 기반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시민사회와 공익활동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단지 어려운 조건에 있는 시민사회 주체들에게 베푸는 수혜의 ‘비용’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1년과 더불어 민선9기 지방정부가 시작된 지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시민들의 힘을 키우는 ‘투자’로 여기는 관점의 전환이 요청된다.
1) 마이클 에드워즈. 서유경 역. 2018. 시민사회. 명인문화사.
2) 프랜시스 후쿠야마. 이상훈 역. 1992. 역사의 종말. 한마음사.
3) UNV. 2022. 2022 State of the World’s Volunteerism Report: Building Equal and Inclusive Societies.
4) 영국 시민사회 협약 홈페이지(https://www.gov.uk/government/publications/civil-society-covenant/civil-society-covenant).
조 철 민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사단법인 시민 정책위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해야 할 때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실로 오래됐지만, 현재의 의미에서 그 관계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즈음이다.1) 동구권이 해체되고 자유주의의 승리로 ‘역사의 종착점’에 다다른 줄 알았지만,2) 인류는 새로운 문제들을 마주했고 이를 해결할 주체로 국가도 시장도 아닌 시민사회가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40여년이 흐른 지금 논의의 중심은 ‘시민사회의 역할’에서 ‘국가-시민사회간 관계’의 문제로 변화하고 있다. 여러 가지 논의들이 있지만 간명하게 다음의 3가지 명제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복잡·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에 있어 시민사회의 역할이 증가하고 있어 효과적인 협력을 위한 관계 재설정이 필요하다. 과거 국가가 사회문제 해결의 주된 역할을 수행하고 부족한 부분을 시민사회가 보완하는 수준에서 시민사회가 감당하는 역할이 점점 더 커지면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어떻게 역할을 나누고 유기적으로 협력하는지가 중요해졌다.
둘째, 늘어나는 역할에 비해 시민사회가 처한 조건은 어려운 상황이고, 정부의 정책적, 제도적 관행은 시민사회의 활성화보다는 규제 중심이다. 시민사회는 자발적 공익활동의 힘으로 작동하는데, 시민들의 일상적 참여도,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나 활동가들이 처한 여건은 늘 어려웠고, 특히 전 세계적 경기불황과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시민사회 관련 정책은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 시절의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공익활동 주체들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활동 여건을 경직시키는 경우가 많다.
셋째, 시민사회는 시민들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힘을 비축하는 저수지와 같다. 즉 사회문제가 나타났을 때 시민사회라는 저수지의 물을 퍼다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쓴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마르지 않는 저수지가 아니어서, 물을 퍼다 쓰는 정책과 함께 물을 채우는 정책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문제 해결에 있어 시민사회의 역할 수행이나 국가-시민사회 사이의 협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미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
국가와 시민사회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한 논의가 우리만의 별스러운 논의일까? 둘러보면 이런 이야기는 이미 부쩍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먼저 국제연합(UN)은 인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추진에 있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계약”(new social contract for a new era)이 필요하며, 이는 “다양한 형태의 사람-국가(People-State) 사이, 즉 민·관 관계를 통해 생성”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기존의 사회계약은 시민들이 권력을 국가에 위임하고 보호를 받는 것에서, 새로운 사회계약은 공동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과 국가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했다. 새로운 관계의 핵심은 시민들이 공론을 통해 정책과정에 뜻을 반영하는 ‘숙의’(Deliberation),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의 ‘협력’(Collaboration), 그리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생각과 실천의 ‘연결’(Connection)로 개념화된다.3)
영국에서는 2025년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시민사회 협약’(Civil Society Covenant)이 출범했다. 이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국가와 시민사회간 협력과 지원에 관한 공동의 약속을 선언한 ‘사회적 협약’으로, 법령은 아니지만 국가와 시민사회간 관계의 준거가 된다. 영국에서 국가-시민사회간 협약은 1998년 ‘정부와 자원봉사 및 지역사회 부문 간의 관계에 관한 협약’(Compact on Relations between Government and the Voluntary and Community Sector in England, 줄여서 The Compact로 불린다)이나 2018년 ‘시민사회전략: 모두를 위한 미래 만들기’(Civil Society Strategy: building a future that works for everyone)을 거쳐 시민사회 협약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이런 시도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국가-시민사회간 협력과 지원에 관한 다양한 협약, 선언, 헌장 등으로 확산됐다. 시민사회와 국가가 함께 논의하고 합의한 상호관계를 공식적인 협약문서로 남기고, 이를 기반으로 상호 노력을 촉구하는 사회적 대화와 협약의 의미를 지닌다. 아래 시민사회 협약문의 한 대목은 협약의 의미와 내용을 잘 드러낸다.4)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관점의 전환
패러다임(Paradigm)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거나 사물에 접근하는 공통된 사고의 틀, 인식 체계”를 의미한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 그리고 국가와 시민사회간 유기적인 협력과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의 전환 없이는 과거의 사례들에서 보듯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저 그럴 듯하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한 철 유행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전 세계적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파도를 탈 준비가 되지 않으면 그 파도에 떠내려가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한 뒤탈은 또 우리가 감당하게 될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시도되고 있는 국가와 시민사회간 협력관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협력관계의 토대를 튼튼하게 하려면 상호 불신에 뿌리를 두는 규제로부터,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고 기다려 주는 신뢰에 기반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시민사회와 공익활동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단지 어려운 조건에 있는 시민사회 주체들에게 베푸는 수혜의 ‘비용’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1년과 더불어 민선9기 지방정부가 시작된 지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시민들의 힘을 키우는 ‘투자’로 여기는 관점의 전환이 요청된다.
1) 마이클 에드워즈. 서유경 역. 2018. 시민사회. 명인문화사.
2) 프랜시스 후쿠야마. 이상훈 역. 1992. 역사의 종말. 한마음사.
3) UNV. 2022. 2022 State of the World’s Volunteerism Report: Building Equal and Inclusive Societies.
4) 영국 시민사회 협약 홈페이지(https://www.gov.uk/government/publications/civil-society-covenant/civil-society-cove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