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시민] #제5편 _ 강내영 이사
올해 초 (사)시민 제6기 임원이 새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해는 조직 재구조화를 위한 전환기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본연의 역할을 상기하면서 또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지, 새롭게 함께 하시게 된 이사님들은 (사)시민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시는지 회원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인사이드 시민'은 시민의 사람(人사이드)을 소개하는 의미와 시민 속으로(inside) 좀 더 깊게 들어가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
다섯번째 인터뷰이는 강내영 이사(연구공방 사람 연구위원)입니다. 강내영 이사님은 영상기록활동을 하다가 지역주민조직운동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현장활동 속의 과제들을 좀 더 잘 풀어가기 위해서 유학을 다녀온 이후, 현장연구자로 전환하여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활동가이자 현장연구자로서 '지역에 희망이 있다'라는 믿음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강내영 이사님의 활동 별칭인 '지퍼(지역퍼실리테이터)'처럼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슈에 대해 안테나를 켜고, 다양한 자원과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강내영 이사님의 활동 궤적과 (사)시민에 대한 단상을 함께 들여다볼까요?
강내영 이사님과 <시민>의 첫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나요?
이강준 전 이사님(노회찬재단 실장)을 통해 <시민>을 알고 있긴 했어요.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건 2023년 1월 제주에서 열린 '현장지식 컨퍼런스'(※참조. 시민사회 현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된 정보와 지식을 연결하고, 연구결과물이 시민사회 공공재로 활용될 수 있도록 시민사회 현장연구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현장연구자들을 연결하기 위한 공론장) 기획단에 참여하면서 좀 더 가깝게 알게 되었어요. 당시 같이 참여했던 분들이 좋아서 이후에도 계속 <시민>에서 관련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시민> 연구위원이나 현장연구자 인터뷰 아카이브인 '디비디비딥'(※참조. 세상을 관찰하고 현장에서 답을 찾는 현장연구자를 만나서 그들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사회 현장을 중심으로 어떤 현장연구를 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나누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로 유튜브 채널 @DB_DB_Deep을 별도로 운영 중임.)도 함께 기획해서 운영하고 있어요.
"세상을 향한 여러 물음으로부터 시작한 사회운동의 시작"
연구활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오고 계신데요, 처음에 어떤 계기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대학 학술부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요. 당시 선배들이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준다고 해서 들어갔어요. (하하) 어느 날 영화를 보여준다고 하면서 서클실에 데려가더니 영화 택시드라이브 소재이기도 했던 독일기자가 찍은 5.18 다큐였어요.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아노미 상태에 빠져서 다시 사춘기가 왔어요. 국가란 무엇인가부터 해서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죠. 내가 갖고 있는 꿈이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죠. 언제든 국가가 개인을 짓밟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든 또 다른 의문은 '왜 난 이 내용을 독일다큐를 보고 알게 되었을까?'에 대한 거였어요. '우리나라 언론은 뭘 하고 있는거지?' 싶었죠. 그러면서 대학 방송국에 들어갔어요. 그런 시절을 보내다가 4학년 때, MBC연수를 받게 되었어요. 연수를 담당하던 카메라기자가 연수생들에게 던진 첫 장면이 그 기자가 찍은 데모 영상을 보여주더라고요. 데모를 하는 학생들과 진압을 하는 전경들을 50:50의 구도로 찍은 영상이지만, 데스크라고 하는 편집을 통해서 10:90의 구도로 편집이 되면 그 순간 대중들은 데모하는 학생들을 악마로 인식하게 된다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냐는 그 질문이 연수 기간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더라고요. '내가 기성언론에 들어갔을 때, 과연 버틸 수 있을까?'에 대한 중압감과 함께 '이렇게 하면서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마음으로 비디오저널리스트 과정을 들었는데, 그때 만난 분이 다큐멘터리 제작의 대부인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이었어요. 김동원 감독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중요한 족적을 많이 남기신 분인데, 그때 그분이 봉천동에 살고 있었어요. 봉천동 주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했는데, 저보고 봉천동 철거지역에 들어가서 철거지역 주민선거운동 과정을 한번 찍어보라고 해서 카메라를 들고 처음 들어갔죠. 철거지역 주민들이 처음으로 주민후보를 내서 합법투쟁을 벌이는 과정 전체를 기록하는 작업이었어요. 작품화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시사매거진2580에 제가 찍은 영상이 소개되기도 했어요. 그게 관악 지역과의 첫 인연이었죠.
그게 시작이 되어서 관악주민연대에서 처음 활동을 하게 되신거죠? 오늘날 이사님이 있기까지 이사님과 관악주민연대는 왠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아요.
네, 앞서 말씀드린 그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관악 지역에 머물면서 주민들과 같이 살았어요. 그때가 1998년 정도인데, IMF시기를 겪다 보니 이분들이 당장 일자리가 없어지고, 길거리에 남게 되는 상황이 빚어지더라고요. 그동안 제가 이분들과 함께 싸웠던 정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의 가정이 IMF로 해체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저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그다지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걸 계속 찍어서 사회에 고발하는 것도 되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당장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걸 보자니 못 참겠더라고요. 뭔가 직접 지원을 하고 싶고, 도움을 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거죠. 그때 마침 관악주민연대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 와서 활동을 시작하였죠. 그때 봉천동 생활안정지원센터를 만들어서 상담원 역할도 하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사회서비스를 지원하고, 매칭하고, 자원을 발굴하는 역할들을 했어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활동을 했죠. 관악주민연대는 여러 차원에서 최초의 사례들을 많이 만들어 온 곳이예요. 2000년대에 일본의 마을만들기 개념이 소개되면서 마을만들기 사례도 관악주민연대가 최초로 했고, 안전한 통학로 만들기 사업도 처음 시작해서 다른 지역까지 확대되었어요.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 주민청원 조례 제정도 했어요. 관악에는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원이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또 여러 대학들이 관악, 동작 쪽에 많이 있어서 거기에서 지원되는 자원들도 무시할 수 없는 자원이기도 하죠. 그런 것들이 관악의 동력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전히 저는 '사람의 힘'이라고 하는 걸 믿어요.
그런 활동들을 계속 이어가는 힘은 뭘까요? 그 동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요?
일상으로서의 활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순간 되게 무거워지거든요. 내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생활하는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20여년 전 관악주민연대에서 활동할 때는 한 달에 25만원을 받았어요. 월급이라는 개념보다는 활동비라고 했죠. 그러다가 어느날 활동비가 50만원으로 2배가 오르니 갑자기 주체를 못하겠더라고요. 25만원으로만 살다보니. (하하) 그 때만 해도 선배들한테 밥 얻어먹고 주민들한테 밥 얻어먹고 하는 게 일상이었고, 여러 자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부족하다고 못 느끼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게 가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관계망'이기도 했어요. 지금 우리는 다 돈으로 해결하잖아요. 관계도 돈으로 사는 관계가 되었거든요. 돈과 환치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면 저는 활동비는 조금 적게 받아도 활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일본 희망제작소에서도 활동하신 적이 있는데요. 일본에서 돌아오신 후에는 어떤 활동들을 이어나가셨나요?
일본 희망제작소를 처음 만드는 역할을 했죠. 그런데 희망제작소 내부 사정으로 일본 활동을 축소하게 되면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당시에 일본에서 막 한국으로 들어왔으니 여러 정보들이 따끈따끈한 사람이잖아요. 예를들면, 커뮤니티 비지니스라든가 사회적경제, 마을만들기 등. 그러니가 여기저기에서 많이 찾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강의도 하고, 청년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그 때 청년들이 많이 하던 말이 '집밥이 그립다'는 말이었어요. 청년들이 소중한 존재인데 다 고립되어서 살고 있는 거잖아요. 그게 한 군데에서만 들리던 게 아니라 여기저기에 가면 계속 듣게 되더라고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죠. 제가 일본을 가기 전만 해도 일이 없어도 그냥 밥을 먹는 게 중요했어요. 밥을 먹으면서 또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와보니 문화가 바뀌었더라고요. 일 없이는 밥을 안 먹는 거예요. 약간 컬쳐쇼크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한 달에 한번 밥을 해 줄테니 오라고 청년들을 초대했죠. 그게 매달 밥을 먹는 모임으로 시작되어 그야말로 '밥모임'이 되었어요. 1년 동안 했어요. 정말 밥만 먹고 헤어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다들 정말 밥만 먹어도 되나 싶은 거죠. 집으로 온 청년들은 모두 저를 매개로 모인 청년들이었는데, 계속 같이 밥을 먹다보니 서로 관계가 형성되더라고요. 일을 통해서 뭐를 만들지 않아도 밥을 먹다가도 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거죠. 지금까지 그 모임을 이어가고 있어요. 이후에 저는 집으로 초대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청년들끼리 서로 초대하면서 모임을 이어갔어요. 그 청년들이 이제는 이미 중견활동가들이 되었죠.
"현장의 시선으로 연구하는 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그리고 우리가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
아시다시피 <시민>이 최근에 비전과 미션, 조직의 핵심목표 등을 새로 마련했는데요. 핵심목표 중의 하나인 '공익활동 지식생태계 구축'이라는 것을 핵심목표로 전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긴 해요. 현장연구자를 지원한다는 것은 과연 <시민>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작년에 진행한 '현장지식 컨퍼런스'에 참여한 분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이런 자리가 너무 소중하다는 거였어요. 주기적으로 이런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 느낀 거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는 환경이다보니 더욱 그런 갈망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비슷한 욕구들이 있어요. 한국이든 일본이든 시민사회 활동이 사회 주류활동이 아닌데요. 분야별로 활동이 쪼개지는 순간 더욱 마이너 활동이 되죠. 그러다보니 지금 내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이 맞는건가 하는 확인을 받고 싶은거죠. 그런 자리를 통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고, 내 동료들이 여기저기 이렇게 있구나 하는 마음을 느끼고, 용기를 받는 자리이기를 기대하는 거죠. 물론 기존에도 분야별로 그런 이벤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시적으로 하는 곳은 사실 많지 않죠. 저는 지역이라고 하는 베이스를 통해 다양한 분야가 어떻게든 넘나들면서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거든요. 융합을 많이 얘기하는 것처럼 실제 우리가 처한 아젠다들은 되게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것만큼 다양하잖아요.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을 할 수 없죠. 이를 두고 제가 평상시에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으로 비유해서 표현하곤 하는데요. 서양의학은 세분화되어 있어서 어디가 아프면 딱 그 부분만 고치는 경우가 있잖아요. 반면 동양의학은 내 몸 전체를 좋게 만들어서 스스로 낫게 하는 힘을 키우는데 있잖아요. 우리의 운동도 동양의학과 같은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요. 내가 최종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거죠. 특정 전문가에게 집중되는 방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중적 시민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분야와 아젠다를 넘어서 연대하고, 연결해야 하죠. 저에게는 연대와 연결이 중요한 키워드예요. 그런 면에서 <시민>도 이와 같이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시민>이 그 역할을 잘 할 거라고 기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이 공간이 그런 것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느끼신건가요?
잘 할 수 있다라고 자부해야죠. 그래야 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잘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보다는 이런 걸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누군가는 해야겠죠.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도 방안일테고요. 그러면 그걸 조직하는 것부터가 <시민>의 역할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시민>이라고 이야기할 때, 과연 <시민>이라는 조직 안에서 <시민>은 누구일까요? 사무처일까요? 이사들일까요? 누구일까요? 모두가 <시민>이어야 하잖아요. <시민>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이런 거라고 하는 걸 우리 스스로가 자처하고, 호명한다면 그럴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조직하고, 그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잘 할 수 있냐 없냐보다는 해 보고 나서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민>에서 '디비디비딥'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계신데, 같이 진행하시는 오현순 박사님과의 케미도 그렇고 상당히 즐겁게 참여하시는게 느껴져요. 한편 또 의무감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책임감도 느껴지기도 하는데 어떠세요?
모든일이 다 그러지 않을까요? 즐겁지만 의무감이 있어야 일을 해나가는 힘이 생기기도 하죠. 즐거움이라는 것이 포괄적이긴 한데 즐거움이 감각적인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해냈을 때의 성취감도 즐거움일수 있으니까요. 같이하는 사람들 간의 케미가 좋아서 즐거운게 아닌가해요. 또한 상상하던것들이 실현되는 것도 즐거웠던 것 같아요. 이런 거 해 보면 어떨까라며 막 던진 이야기들이 실제로 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무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요. 현장연구자를 찾아내서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스토리, 어떤 마음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왜 이들이 묵묵하게 하고 있는지, 그 서사를 같이 공유하면서 자기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장연구자들을 만나는 그 시간이 주는 충만함이 있어요.
그 느낌을 참여하는 사람들만 느끼는 아쉬움이 때로는 있긴 해요. 인터뷰 내용을 바로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또 휘발되어 버릴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 순간을 잘 포착하고 알리는 것에 대한 고민도 있어요.
그래서 라이브 인터뷰를 하려고도 고민하였죠. 저도 비슷한 고민이예요. 우리가 '디비디비딥'을 하는 이유는 대중화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차곡차곡 쌓는 DB화란 말이죠. 잘 쌓아 놓으면 추후 분야 별로 여러 형태로 활용이 가능하고, 시리즈로 모아서 소개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한편으로 고민은 현장연구자를 대상으로 만나고 있는데, 지금 <시민>이 '공익활동'이라는 타이틀이 전면화되다 보니 공익활동가를 만나야하나 하는 고민이 드는거예요. 공익활동이라고 할 때는, 어쨌든 지금 만나는 대상보다는 더 넓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디비디비딥' 두 번째 스테이지는 공익활동가를 만나는 형태로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단체들을 엮고, 연결하고, 판을 까는 역할을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들"
<시민>이 잘 할 수 있는 것과 강점은 무엇일까요?
단체들을 묶을 수 있는 포지셔닝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라고 자임한 것처럼 그 역할을 잘 해야겠죠. 현장단체들이 <시민>이 있어서 우리 단체가 소중하게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에 진행한 이사회에서도 <시민>이 누구를 대상으로 조직화를 해야하나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일차적으로는 단체여야 하지 않을까 해요. 이들을 위해 장을 깔고, 열어주는 역할이 중요하죠. 이를테면 매칭캠프 같은 것도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끝으로 사무처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위와 같은 역할을 위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조직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사무처의 여력도 그렇지만 사무처가 직접 무언가를 하기 보다는 자원을 매칭할 수 있는 사람을 조직하고, 그런 지원을 하는 것이 필요하죠.
"지역에 여전히 희망이 있고, 그 활동을 하는 사람의 힘과 연결의 힘"을 이미 일찌감치 경험하신 강내영 이사님의 시민사회에 대한 애정과 내공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특히, 시민사회 현장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묵묵하게 우직하게 활동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어떠한 충만감을 느낀다고 말씀하시는 모습 속에서 강내영 이사님만의 마음 깊은 뜨거움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기록활동가에서 지역주민조직운동가로, 현장연구자로, 지역 퍼실리테이터로, 일본 시민사회 연구자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민교육전문가로 다양한 포지셔닝으로 활동을 해 오셨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그 활동의 궤적이 어떻게 보면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동안 <시민>이 시민다운 활동을 하려면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에 대한 인사이트도 안겨주시고, 덤으로 <시민>이 창립 이래로 처음 진행하게 되는(두근두근💓) 후원행사(10월 하순 coming soon!)에 대한 아이디어와 서프라이즈 후원물품(나중에 공개되면 모두가 깜짝! 놀랄지도! 😆)도 미리 준비해주셨습니다. 현장연구자이자 연구활동가인 강내영 이사님의 '활동의 즐거움'이 <시민> 안에서 함께 충만하게 녹아들 수 있길 기대합니다.
📢 인터뷰어 : 사무처 김유리&김승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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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시민] #제5편 _ 강내영 이사
강내영 이사님과 <시민>의 첫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나요?
이강준 전 이사님(노회찬재단 실장)을 통해 <시민>을 알고 있긴 했어요.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건 2023년 1월 제주에서 열린 '현장지식 컨퍼런스'(※참조. 시민사회 현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된 정보와 지식을 연결하고, 연구결과물이 시민사회 공공재로 활용될 수 있도록 시민사회 현장연구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현장연구자들을 연결하기 위한 공론장) 기획단에 참여하면서 좀 더 가깝게 알게 되었어요. 당시 같이 참여했던 분들이 좋아서 이후에도 계속 <시민>에서 관련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시민> 연구위원이나 현장연구자 인터뷰 아카이브인 '디비디비딥'(※참조. 세상을 관찰하고 현장에서 답을 찾는 현장연구자를 만나서 그들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사회 현장을 중심으로 어떤 현장연구를 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나누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로 유튜브 채널 @DB_DB_Deep을 별도로 운영 중임.)도 함께 기획해서 운영하고 있어요.
"세상을 향한 여러 물음으로부터 시작한 사회운동의 시작"
연구활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오고 계신데요, 처음에 어떤 계기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대학 학술부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요. 당시 선배들이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준다고 해서 들어갔어요. (하하) 어느 날 영화를 보여준다고 하면서 서클실에 데려가더니 영화 택시드라이브 소재이기도 했던 독일기자가 찍은 5.18 다큐였어요.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아노미 상태에 빠져서 다시 사춘기가 왔어요. 국가란 무엇인가부터 해서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죠. 내가 갖고 있는 꿈이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죠. 언제든 국가가 개인을 짓밟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든 또 다른 의문은 '왜 난 이 내용을 독일다큐를 보고 알게 되었을까?'에 대한 거였어요. '우리나라 언론은 뭘 하고 있는거지?' 싶었죠. 그러면서 대학 방송국에 들어갔어요. 그런 시절을 보내다가 4학년 때, MBC연수를 받게 되었어요. 연수를 담당하던 카메라기자가 연수생들에게 던진 첫 장면이 그 기자가 찍은 데모 영상을 보여주더라고요. 데모를 하는 학생들과 진압을 하는 전경들을 50:50의 구도로 찍은 영상이지만, 데스크라고 하는 편집을 통해서 10:90의 구도로 편집이 되면 그 순간 대중들은 데모하는 학생들을 악마로 인식하게 된다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냐는 그 질문이 연수 기간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더라고요. '내가 기성언론에 들어갔을 때, 과연 버틸 수 있을까?'에 대한 중압감과 함께 '이렇게 하면서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마음으로 비디오저널리스트 과정을 들었는데, 그때 만난 분이 다큐멘터리 제작의 대부인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이었어요. 김동원 감독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중요한 족적을 많이 남기신 분인데, 그때 그분이 봉천동에 살고 있었어요. 봉천동 주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했는데, 저보고 봉천동 철거지역에 들어가서 철거지역 주민선거운동 과정을 한번 찍어보라고 해서 카메라를 들고 처음 들어갔죠. 철거지역 주민들이 처음으로 주민후보를 내서 합법투쟁을 벌이는 과정 전체를 기록하는 작업이었어요. 작품화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시사매거진2580에 제가 찍은 영상이 소개되기도 했어요. 그게 관악 지역과의 첫 인연이었죠.
그게 시작이 되어서 관악주민연대에서 처음 활동을 하게 되신거죠? 오늘날 이사님이 있기까지 이사님과 관악주민연대는 왠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아요.
네, 앞서 말씀드린 그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관악 지역에 머물면서 주민들과 같이 살았어요. 그때가 1998년 정도인데, IMF시기를 겪다 보니 이분들이 당장 일자리가 없어지고, 길거리에 남게 되는 상황이 빚어지더라고요. 그동안 제가 이분들과 함께 싸웠던 정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의 가정이 IMF로 해체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저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그다지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걸 계속 찍어서 사회에 고발하는 것도 되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당장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걸 보자니 못 참겠더라고요. 뭔가 직접 지원을 하고 싶고, 도움을 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거죠. 그때 마침 관악주민연대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 와서 활동을 시작하였죠. 그때 봉천동 생활안정지원센터를 만들어서 상담원 역할도 하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사회서비스를 지원하고, 매칭하고, 자원을 발굴하는 역할들을 했어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활동을 했죠. 관악주민연대는 여러 차원에서 최초의 사례들을 많이 만들어 온 곳이예요. 2000년대에 일본의 마을만들기 개념이 소개되면서 마을만들기 사례도 관악주민연대가 최초로 했고, 안전한 통학로 만들기 사업도 처음 시작해서 다른 지역까지 확대되었어요.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 주민청원 조례 제정도 했어요. 관악에는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원이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또 여러 대학들이 관악, 동작 쪽에 많이 있어서 거기에서 지원되는 자원들도 무시할 수 없는 자원이기도 하죠. 그런 것들이 관악의 동력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전히 저는 '사람의 힘'이라고 하는 걸 믿어요.
그런 활동들을 계속 이어가는 힘은 뭘까요? 그 동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요?
일상으로서의 활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순간 되게 무거워지거든요. 내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생활하는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20여년 전 관악주민연대에서 활동할 때는 한 달에 25만원을 받았어요. 월급이라는 개념보다는 활동비라고 했죠. 그러다가 어느날 활동비가 50만원으로 2배가 오르니 갑자기 주체를 못하겠더라고요. 25만원으로만 살다보니. (하하) 그 때만 해도 선배들한테 밥 얻어먹고 주민들한테 밥 얻어먹고 하는 게 일상이었고, 여러 자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부족하다고 못 느끼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게 가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관계망'이기도 했어요. 지금 우리는 다 돈으로 해결하잖아요. 관계도 돈으로 사는 관계가 되었거든요. 돈과 환치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면 저는 활동비는 조금 적게 받아도 활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일본 희망제작소에서도 활동하신 적이 있는데요. 일본에서 돌아오신 후에는 어떤 활동들을 이어나가셨나요?
일본 희망제작소를 처음 만드는 역할을 했죠. 그런데 희망제작소 내부 사정으로 일본 활동을 축소하게 되면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당시에 일본에서 막 한국으로 들어왔으니 여러 정보들이 따끈따끈한 사람이잖아요. 예를들면, 커뮤니티 비지니스라든가 사회적경제, 마을만들기 등. 그러니가 여기저기에서 많이 찾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강의도 하고, 청년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그 때 청년들이 많이 하던 말이 '집밥이 그립다'는 말이었어요. 청년들이 소중한 존재인데 다 고립되어서 살고 있는 거잖아요. 그게 한 군데에서만 들리던 게 아니라 여기저기에 가면 계속 듣게 되더라고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죠. 제가 일본을 가기 전만 해도 일이 없어도 그냥 밥을 먹는 게 중요했어요. 밥을 먹으면서 또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와보니 문화가 바뀌었더라고요. 일 없이는 밥을 안 먹는 거예요. 약간 컬쳐쇼크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한 달에 한번 밥을 해 줄테니 오라고 청년들을 초대했죠. 그게 매달 밥을 먹는 모임으로 시작되어 그야말로 '밥모임'이 되었어요. 1년 동안 했어요. 정말 밥만 먹고 헤어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다들 정말 밥만 먹어도 되나 싶은 거죠. 집으로 온 청년들은 모두 저를 매개로 모인 청년들이었는데, 계속 같이 밥을 먹다보니 서로 관계가 형성되더라고요. 일을 통해서 뭐를 만들지 않아도 밥을 먹다가도 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거죠. 지금까지 그 모임을 이어가고 있어요. 이후에 저는 집으로 초대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청년들끼리 서로 초대하면서 모임을 이어갔어요. 그 청년들이 이제는 이미 중견활동가들이 되었죠.
"현장의 시선으로 연구하는 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그리고 우리가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
아시다시피 <시민>이 최근에 비전과 미션, 조직의 핵심목표 등을 새로 마련했는데요. 핵심목표 중의 하나인 '공익활동 지식생태계 구축'이라는 것을 핵심목표로 전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긴 해요. 현장연구자를 지원한다는 것은 과연 <시민>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작년에 진행한 '현장지식 컨퍼런스'에 참여한 분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이런 자리가 너무 소중하다는 거였어요. 주기적으로 이런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 느낀 거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는 환경이다보니 더욱 그런 갈망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비슷한 욕구들이 있어요. 한국이든 일본이든 시민사회 활동이 사회 주류활동이 아닌데요. 분야별로 활동이 쪼개지는 순간 더욱 마이너 활동이 되죠. 그러다보니 지금 내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이 맞는건가 하는 확인을 받고 싶은거죠. 그런 자리를 통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고, 내 동료들이 여기저기 이렇게 있구나 하는 마음을 느끼고, 용기를 받는 자리이기를 기대하는 거죠. 물론 기존에도 분야별로 그런 이벤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시적으로 하는 곳은 사실 많지 않죠. 저는 지역이라고 하는 베이스를 통해 다양한 분야가 어떻게든 넘나들면서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거든요. 융합을 많이 얘기하는 것처럼 실제 우리가 처한 아젠다들은 되게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것만큼 다양하잖아요.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을 할 수 없죠. 이를 두고 제가 평상시에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으로 비유해서 표현하곤 하는데요. 서양의학은 세분화되어 있어서 어디가 아프면 딱 그 부분만 고치는 경우가 있잖아요. 반면 동양의학은 내 몸 전체를 좋게 만들어서 스스로 낫게 하는 힘을 키우는데 있잖아요. 우리의 운동도 동양의학과 같은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요. 내가 최종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거죠. 특정 전문가에게 집중되는 방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중적 시민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분야와 아젠다를 넘어서 연대하고, 연결해야 하죠. 저에게는 연대와 연결이 중요한 키워드예요. 그런 면에서 <시민>도 이와 같이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시민>이 그 역할을 잘 할 거라고 기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이 공간이 그런 것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느끼신건가요?
잘 할 수 있다라고 자부해야죠. 그래야 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잘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보다는 이런 걸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누군가는 해야겠죠.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도 방안일테고요. 그러면 그걸 조직하는 것부터가 <시민>의 역할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시민>이라고 이야기할 때, 과연 <시민>이라는 조직 안에서 <시민>은 누구일까요? 사무처일까요? 이사들일까요? 누구일까요? 모두가 <시민>이어야 하잖아요. <시민>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이런 거라고 하는 걸 우리 스스로가 자처하고, 호명한다면 그럴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조직하고, 그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잘 할 수 있냐 없냐보다는 해 보고 나서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민>에서 '디비디비딥'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계신데, 같이 진행하시는 오현순 박사님과의 케미도 그렇고 상당히 즐겁게 참여하시는게 느껴져요. 한편 또 의무감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책임감도 느껴지기도 하는데 어떠세요?
모든일이 다 그러지 않을까요? 즐겁지만 의무감이 있어야 일을 해나가는 힘이 생기기도 하죠. 즐거움이라는 것이 포괄적이긴 한데 즐거움이 감각적인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해냈을 때의 성취감도 즐거움일수 있으니까요. 같이하는 사람들 간의 케미가 좋아서 즐거운게 아닌가해요. 또한 상상하던것들이 실현되는 것도 즐거웠던 것 같아요. 이런 거 해 보면 어떨까라며 막 던진 이야기들이 실제로 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무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요. 현장연구자를 찾아내서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스토리, 어떤 마음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왜 이들이 묵묵하게 하고 있는지, 그 서사를 같이 공유하면서 자기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장연구자들을 만나는 그 시간이 주는 충만함이 있어요.
그 느낌을 참여하는 사람들만 느끼는 아쉬움이 때로는 있긴 해요. 인터뷰 내용을 바로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또 휘발되어 버릴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 순간을 잘 포착하고 알리는 것에 대한 고민도 있어요.
그래서 라이브 인터뷰를 하려고도 고민하였죠. 저도 비슷한 고민이예요. 우리가 '디비디비딥'을 하는 이유는 대중화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차곡차곡 쌓는 DB화란 말이죠. 잘 쌓아 놓으면 추후 분야 별로 여러 형태로 활용이 가능하고, 시리즈로 모아서 소개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한편으로 고민은 현장연구자를 대상으로 만나고 있는데, 지금 <시민>이 '공익활동'이라는 타이틀이 전면화되다 보니 공익활동가를 만나야하나 하는 고민이 드는거예요. 공익활동이라고 할 때는, 어쨌든 지금 만나는 대상보다는 더 넓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디비디비딥' 두 번째 스테이지는 공익활동가를 만나는 형태로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단체들을 엮고, 연결하고, 판을 까는 역할을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들"
<시민>이 잘 할 수 있는 것과 강점은 무엇일까요?
단체들을 묶을 수 있는 포지셔닝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라고 자임한 것처럼 그 역할을 잘 해야겠죠. 현장단체들이 <시민>이 있어서 우리 단체가 소중하게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에 진행한 이사회에서도 <시민>이 누구를 대상으로 조직화를 해야하나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일차적으로는 단체여야 하지 않을까 해요. 이들을 위해 장을 깔고, 열어주는 역할이 중요하죠. 이를테면 매칭캠프 같은 것도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끝으로 사무처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위와 같은 역할을 위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조직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사무처의 여력도 그렇지만 사무처가 직접 무언가를 하기 보다는 자원을 매칭할 수 있는 사람을 조직하고, 그런 지원을 하는 것이 필요하죠.
"지역에 여전히 희망이 있고, 그 활동을 하는 사람의 힘과 연결의 힘"을 이미 일찌감치 경험하신 강내영 이사님의 시민사회에 대한 애정과 내공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특히, 시민사회 현장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묵묵하게 우직하게 활동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어떠한 충만감을 느낀다고 말씀하시는 모습 속에서 강내영 이사님만의 마음 깊은 뜨거움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기록활동가에서 지역주민조직운동가로, 현장연구자로, 지역 퍼실리테이터로, 일본 시민사회 연구자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민교육전문가로 다양한 포지셔닝으로 활동을 해 오셨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그 활동의 궤적이 어떻게 보면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동안 <시민>이 시민다운 활동을 하려면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에 대한 인사이트도 안겨주시고, 덤으로 <시민>이 창립 이래로 처음 진행하게 되는(두근두근💓) 후원행사(10월 하순 coming soon!)에 대한 아이디어와 서프라이즈 후원물품(나중에 공개되면 모두가 깜짝! 놀랄지도! 😆)도 미리 준비해주셨습니다. 현장연구자이자 연구활동가인 강내영 이사님의 '활동의 즐거움'이 <시민> 안에서 함께 충만하게 녹아들 수 있길 기대합니다.
📢 인터뷰어 : 사무처 김유리&김승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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